Rup.L의 글상자

'느낌을 공유하기 위한 작품으로서의 글쓰기'의 가치를 지향합니다.

생각상자/에세이

글쓰기에 대한 이미지

RupL 2021. 9. 9. 12:43

나에게 글쓰기라는 단어만 던져주고 생각나는 게 있냐고 물어보면 아마도 목장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목장. 그것도 버려진 목장. 한때는  수많은 동물을 거느린 부자가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실감할 정도로 넓은 풀밭과 그 한쪽에 쳐진 나무로 된 울타리. 그리고 풀밭에는 소와 말이 먹는 풀들과 이미 오래 지나서 치고 올라오기 시작하는 잡초들이 뒤엉켜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글쓰기'의 목장은 이런 평화로운 모습이 다가 아니다. 울타리 안에 높이가 3미터에 이르는 웅장한 콘크리트 벽이 하나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콘크리트 벽은 마치 페인트를 묻힌 손가락으로 쓴 것처럼 아무렇게나 많은 단어들이 쓰여 있다. 한 쪽에는 '글짓기의 모든 것', '글 쓰는 법', '글쓰기의 원리' 같은, 글쓰기를 위해 뭔가를 배워야 한다는 내용들이 가득 적혀 있다. 반면 반대편 쪽에는 '누구나 하는 글짓기', '나도 글을 쓸 수 있다'와 같이 글쓰기는 누군가에게만 열린 것이 아니라는 내용이 적혀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글쓰기는 학교에 제출하는 일기장과 함께 시작되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 마치 고정관념처럼 새겨지고 말았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할 말을 적는다든가, 정말 이유없이 적어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하기 힘들다. 경험으로, 생각나는 것을 수다떨듯이 적어 내려가면 후에 심리적으로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귀찮아서' 수첩을 펴는 일을 뒤로 미루는 것을 보면 보여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것 같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수첩에 처음 글을 쓸 때에는 마치 일기를 쓸 때처럼 처음 몇 장은 쓰다 말다를 반복했다. 그러다 힘을 빼고 그냥 생각나는 대로 쓰기로 하자, 나중에 읽어보니 무슨 말인지 전혀 알 수 없는 내용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무언가가 나온다는 것 자체에 재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처음에 어려워 보이기만 하던 프라모델이 한두 개를 완성해 보니 완성품보다도 조립하는 과정이 재미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과 같다. 글씨를 쓸 때의 사각사각하는 종이의 느낌과 소리, 타자를 칠 때 가볍게 울리는 키보드의 소리. 이제 서너 권을 지나는 내 수첩은그래서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표현을 만들고 손가락이 힘껏 그것을 세상에 실재로서 나타내는 흔적이 된다. 그래서 지금도 문구점에 가면 필기구 코너를 꼭 지나치게 되고 전자제품 판매하는 곳에 가면 키보드를 꼭 두들겨 본다. 요즘은 기계식 키보드의 손맛을 알아서 고급사양으로 두 개를 주문해 놓았다. 물론 휴대할 수 있는 제품으로. 예전과는 달리 지금은 블로그 포스트 길이의 글을 휴대폰 화면에 쓰다 보면 엄지손가락이 아파서 예전부터 사용하던 돌돌 마는 엘지 키보드를 사용한다. 되다 안되다 하지만 될 때는 불편해도 쓸 만은 하다. 키가 너무 작고 펑션 키(Fn)를 눌러야 하는 일이 많아서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래도 엄지는 보호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기계식 키보드들이 오고 나면 부피가 조금 크더라도 아마 그쪽을 택하지 않을까 싶다.
틈틈이 쓰는 것도 좋지만 작가처럼 몇 시간을 하루에서 떼어내어 글쓰기에만 할애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면 글쓰기 외에도 돈벌이가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그냥 가벼운 부러움으로 남겨두려고 한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내일 읽을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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