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p.L의 글상자

'느낌을 공유하기 위한 작품으로서의 글쓰기'의 가치를 지향합니다.

생각상자/에세이

비가 올 듯한 어느 나른한 오후

RupL 2021. 9. 5. 18:07

이 시간까지는 보통 햇살이 남아있던 듯한데 오늘은 어둑어둑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잠깐 외출할 때 빗방울이 조금 떨어졌던 것 같다. 그때도 구름이 가득해서 돌아오기 전에 비가 쏟아지지 않을까 하고 살짝 걱정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여름이라고 습기에 나른해진다. 조용히 음악을 틀어 놓고 묵직한 타자기형 키보드를 꺼낸다. 휴대폰을 거치하고 하얀 화면을 바라보며 무슨 글자를 칠까 살짝 고민을 하다 그냥 있는 그대로 문장을 시작한다.

이 시간까지는 보통 햇살이 남아있던 듯한데 오늘은 어둑어둑하다.

냉장고에서 커피를 하나 꺼내왔다. 커피를 마시기 늦은 시간일까 싶지만 술보다는 낫겠지, 하는 생각으로 뚜껑을 열었다. '조지아 크래프트 콜드브루 블랙'이라고 쓰여 있다. 유통기한은 6개월 넘게 남았지만 언제 구입한 건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제까지는 있는 줄도 몰랐으니 유통기한이 지나기 전에 마셔 버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커피를 마신다고 정신이 바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나른함은 어느 정도 유지될 것이다. 타자 소리에 음악이 묻히는 것 같아 휠을 조금 돌려 볼륨을 올렸다. 재즈 곡이라 그 정도로 분위기를 망치지는 않는다.
비가 오기 시작하는 모양이다. 보일러 연통에 물방울 부딪히는 소리가 투둑 투둑 들리기 시작한다. 오늘은 쓴 술맛이 생각나지 않는다. 모처럼 쓴 맛이 느껴지는 커피향이 좋다. 오후 여섯 시지만, 괜찮겠지?
커피를 처음 마셨을 때가 생각난다. 고등학교 시절 야간 자율학습 시간이었다. 그때는 졸리면 그냥 엎드려서 잤다. 하지만 그날, 이해가 안 가는 게 있었는데 계속 읽다보니 조금만 더 읽으면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순간 졸음이 쏟아졌다. 예전같으면 그냥 엎드렸겠지만, 그날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교실까지 종이컵을 들고 와서 훌쩍훌쩍 커피 마시던 녀석에게 커피 마시러 가자고 했다. 그때는 커피 한 잔이 150원이었다. 300원이면 두 잔이 딱 나왔다. 혼자 가서 뭐가 뭔지도 모르겠는 자판기 앞에서 고민하고 싶지도 않았고, 50원짜리 거스름돈을 챙기고 싶지 않았기도 했다.
커피 자판기에는 '블랙커피', '밀크커피', '크림커피', '율무차'가 있었다. 블랙커피는 말 그대로 쓴 커피, 밀크커피는 우유가 든 커피, 크림커피는 프림이 든 커피라던데, 내 입맛에는 밀크커피와 크림커피의 차이는 프림의 양 차이가 아닌가 싶었다. 그 날 이후로 그 둘을 번갈아가면서 설탕맛을 음미했다.
아메리카노를 처음 맛본 것은 대학생 시절, 시험공부한다고 도서관에서 밤을 새다 나와서 바람을 쐬면서 24시간 영업하는 맥도널드에서였다. 그때까지는 자판기 커피나 레쓰비 캔커피를 마셨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학교에서 20분이나 걸어 나와서 아메리카노를 시켜서 길거리에서 홀짝거리면서 걸었다. 도서관에 도착할 때까지 반도 못 마셨던 것 같다. 첫인상은 '아, 쓰다!!'였다. 향은 커피가 맞지만 맛은 커피였다. 그러니까, 설탕맛이 아니었다. 내가 알던 커피와는 달랐던 것이다. 아마 그날은 그 쓴맛으로 밤을 무사히 샜던 것 같다. 대학 4학년 때였다.
멍하게 밖을 내다보면서, 음악 소리와 섞인 타자 소리를 들으면서 하얀 바탕에 검은색 글씨가 물드는 작은 핸드폰 화면을 보고 있자니 여러 가지 생각이 난다. 시간을 마음껏 흘려 보내는 느낌. 내 안의 뭔가를 놓아주는 느낌. 이런 시간이, 밤이 다가온다고 더 잘 느껴야 한다고 조바심내지 않는 나날이 얼마나 좋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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