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한 휴일 오후, 문득 책상 구석에 있는 타자기 모양의 키보드를 의자 가까이 당기고 아이패드를 세운다. 굳이 다른 도구도 상관이 없지만 메모장을 열어 첫 문장을 쓴다.
'오늘은 정말로 한가한 오후이다.'
원래 이런 것은, 누가 읽어도 평가할 일도, 슬퍼할 일도 없는 그냥 평범한 문장이기 때문에 블로그에 적어도 상관이 없다. 하지만 어차피 쓰고 바로 지울 것을 로그인까지 해서 쓰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뭔가를 머릿속에서 실타래를 당겨서 풀어내듯이 꺼내 놓는 것이 목적이지 내려놓은 것을 다시 보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다쟁이들이 모여서 하는 그 수많은 말들이 모두 의미를 가진 것은 아니듯이, 뭔가를 쓰고 싶다는 느낌이 그 뭔가보다 중요하게 여겨질 때면 대화하는 심정으로 글자로 풀어내기만 한다면 그 이후는 어떻게 되든 좋은 것이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들어가서, 머릿속에 한 문장이 떠올랐고, 그 문장을 기억하고 싶은 때에는 에버노트냐 블로그냐의 기로에 서게 된다. 블로그라도 상관은 없기는 하다. 차마 남에게 하지 못할 이야기를 쓰는 일은 없으니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글들 역시 나중에 누군가는 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마지막으로, 책을 읽을 때 마음에 드는 구절들을 남기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dynalist 앱을 사용한다. 웹으로도 사용할 수 있지만 싱크가 늦어서 앱을 사용하는데, 노트 간 폴더 정리는 에버노트와 비슷하고 본문은 자동으로 항목으로 분류가 되는데 기기 수 제한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어서 어디서나 같은 기기가 없어도 사용하기 좋다는 장점이 있다.
이렇게 해서 한 권을 페이지 수, 문장 순으로 정리를 하고 나면 그 전에 옮겨 두었던 다른 책들의 문장들도 다시 읽어보게 된다. 이것저것 섞여 있으면 삼천포로 빠지기 쉽지만 dynalist에는 순수하게 옮긴 글밖에 없기에 업무보듯이 빠르게 입력만 하고 나온다.
여러 가지의 서비스를 사용하게 되면 헷갈리게 마련이라 한번쯤 통일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지금으로서는 블로그가 가장 좋아 보이기는 한다. 블로그는 이제까지 경험상 입력 방법이나 관리 차원에서는 항상 최신이 과거보다 낫다. 공유하기도 쉽다. 혼자 보고 싶은, 책 구절 정리 같은 것은 비공개로 놔두면 된다. 로그인해서 언제든지 읽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블로그를 엠파스에서 시작한 탓에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항상 있다. 물론 다른 서비스라고 해서 온라인 치고 그런 걱정이 없는 것은 없다.
그래서 항상 고민만 하고 쓰게 되면 쓴다. 종이의 질감이 그리울 때는 그냥 수첩에 적기도 하고, 수첩에 적은 것에 아이디어를 더 붙이고 싶으면 책상 앞에 앉아서 수첩을 펴들고 블로그를 들여다보기도 한다. 뭔가가 내 머릿속에서 내 손을 통해 나온다는 것, 내 머리 속에서 나와 다른 뭔가의 형태에 새겨진다는 것은 항상 경이롭다. 내가 하는 말은 나의 삶을 나타낼 수 있지만, 나를 분자, 아니 원자 구조까지 분석하더라도 그 말을 찾아낼 수는 없듯이, 나는 언제나 그 말을 할 수 있고 쓸 수 있지만 더이상 나는 아닌 것이 그 문장인 것이다. 그렇게 나는 세상에 흔적을 하나씩 남겨 간다. 나 혼자만 느끼다 어느 순간 www의 종말과 함께 블로그가 사라지고 큰 화마와 함께 수첩이 사라진다고 해도 마치 자가분열이 자연스러운 세포와 같이 그저 본능처럼 그렇게 살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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